대한민국 헌법 제19조에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으며 제20조는 연이어 “①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못 박고 있다. 총회 내내 이 법조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왜일까??

총회를 참관하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교인들은 국민인가, 교인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하게 되었다. 고신총회에 올라온 안건의 일부가 사회법과 교회법의 우선여부를 질의하는 것이 있었으며 실제 그 질문을 가능하게 한 ‘고려신학대학원 000 교수의 입시비리’ 사건이 연관되어 있었다. 참관하는 입장에서 누구의 잘잘못을 가릴 생각은 없다. 단지 그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돌아보고자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헌법에는 아래와 같은 조문이 있다.

교회정치, 제1장 교회 정치 원리

제1조 양심의 자유
양심을 주재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그가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그 말씀에 위반되거나 탈선되는 사람의 명령이나 교리를 받지 않게 양심의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종교에 관계되는 각 항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자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으므로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말할 뿐, 그 양심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 양심의 문제는 ‘개인의 신념’과 연결되며, 개인의 신념 내용에는 ‘종교’가 연관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19조, 20조가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총회 헌법에는 분명하게 양심의 주재가 ‘하나님’임을 밝히고 있으며, 내용을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그 말씀에 위반되거나 탈선되는 사람의 명령이나 교리를 받지 않는 것’이라고 명시한다.

헌법은 고신교단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에 대하여 ‘하나님’의 주재하심을 인정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는 ‘인정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말은 양심이 원인이나 주재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이 헌법의 대상에서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다시 총회로 돌아오면, ‘총회에서 사회법이 우선인가, 교회법이 우선인가’에 대한 논쟁을 지켜보면서 이 논쟁 자체가 자신의 소속을 규정하고 싶은 마음과 교단의 영향력을 넓히거나 좁히는 문제로 이동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회법이 우선한다고 다수결로 주장되었지만 여전히 찜찜함이 남는 것은 왜일까?

총회는 현실적 최고의 의결기구로 자리하고 있으며 교단 소속의 사람들의 행동과 양심의 문제도 판단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자리이다. 그러므로 총회의 조직은 자신의 ‘관할, 통치’ 범위를 확정하고자 하며, 그 확정하는 근거로 법적 치리의 문제가 나오게 된다.

만약 총회의 헌법이 통하지 않는 영역이 생긴다면, 우선하지 않는 영역이 생긴다면 총회의 영향력은 줄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조직의 생존생리가 바로 ‘사회법과 교회법의 우선’문제로 불거져 나왔다고 생각한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영역’의 문제인 것이다.

교회법과 사회법이 우선순위 논쟁은 교회가 존재하고, 종교가 존재하는 한 끊임임 없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의 핵심은 논쟁의 중심에 ‘대한민국 국민과 총회 소속 교인’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며 개인은 논쟁이 결과를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어떤 결정이든. 안타까운 것은 한 국가의 헌법이 보장하는 것도 한 개인의 양심이며, 교단 총회 헌법이 보장하고 지키고자 하는 것도 한 개인의 양심이인데, 정작 논의의 중심에 그 개인이 없다는 것이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도 ‘결정의 문제점’만을 지적하며, 총대들도 ‘교단의 부끄러움’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았다.

총회를 지켜보면서 끊임없이 들었던 생각은 ‘총대들은 과연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었다. 때로는 아주 진지한 논의를 보면서 우리사회의 성숙함과 교단 총대들의 성실함을 느낄 수 있었으나, 결국 총회장에 모인 다수는 자신들의 결정이 한 개인에게 어떤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영역의 문제는 ‘부피’가 아니라 ‘밀도’일지 모른다. 교인의 수보다 교인 한 사람의 신앙생활과 삶의 질이 중요한 것이라면 총회는 부피의 문제보다 자신들의 논의와 결정이 한 개인의 삶의 질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좀 더 진지하게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처음 참관하는 자리라 어리둥절하고 분위기 파악도 못했지만, 신앙과 삶이라는 문제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참관단으로 활동하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도임방주/ KSCF 간사·고신총회 참관인